글|PR팀 현지민
“이모는 커서 뭐가 될 거야?” 묻는 조카에게 “이모는 다 큰 거야.”라고 하니, “그럼 이모는 뭐가 된 거야?”라고 순수하게 되묻는 SNS ‘짤’을 봤다. 크게 웃다가 금세 적적해졌다. 다 큰 나는 뭐가 됐나.
커서 분홍색이 되겠다거나, 천사소녀 네티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그럴싸한 나의 첫 장래 희망은 시인이었다. 초등학교에서 열린 동시 대회에서 돌고래를 주제로 쓴 동시로 우수상을 탄 직후였다. 그때 담임 선생님은 다정한 눈빛과 달리 꽤 현실적이고 단호한 조언을 했다. 아이고, 글 쓰는 건 돈이 안 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MBTI S, T임에 틀림없다.) 당시 그녀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빼꼼 움튼 꿈을 귀히 여기지 못하고 내팽개치기엔 충분했다. 그 이후로는 장래 희망 칸에 변호사나 의사, 통역사 같은 걸 적었던 것 같다.
살면서 글의 유혹은 계속됐다. 중학생 때는 보이그룹에 대한 사랑이 넘쳐 팬픽(Fan Fiction, 팬이 만드는 창작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싸이월드에 셀카라도 한 장 올리려면 감성 글귀가 필요했기 때문에 별것 아닌 감정에도 문장을 갖다 붙이길 여러 날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반복되는 일상조차 얼마나 재미있는지 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청춘에게는 글 쓰는 일보다 더 재미있는 게 많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영어영문학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대학교 1학년 때 수강했던 교양 과목이었다.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이 진행하는 그 수업에서 수필을 쓰게 됐는데, 경험과 생각을 글로 풀어내며 전에 없던 해소를 느껴버린 것이다. 그게 화근이었다. 국어국문과를 복수 전공으로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렇게 점점 돈이 안 되는 길로 걷고 있었다.
여기에 식스센스급 반전이 있다. 열정과 재능은 비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터진 열정이 뻥 뚫린 심야 고속도로 위 택시라면, 재능은 두 다리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취업 시장에 내던져진 불안한 청춘에게 ‘글공부를 더 하고 싶어.’, ‘내 글을 쓸 테야.’ 따위의 마음은 사치였다. 그렇게 자기 객관화가 확실했던 이모는… 회식을 좋아하는 K-직장인이 됐단다.
결말이 너무 당황스러워 다시 쓰자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숙제였던 초년생 때를 제외하곤, 평일에 회사에 출근하고, 주말엔 작가 아카데미에 다녔다. 피로는 때때로 열정보다 뜨거웠기에 그것은 일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더러는 숨 쉴 구멍 같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마주하고도, 자취생의 생활비나 결혼 준비 따위의 현실 앞에선 그저 ‘돈이 안 되는 일’일뿐이었다. 동기 중 몇 명이 이름 뒤에 ‘작가’ 타이틀을 달고 멀리 날아갔고, 나는 그저 남들보다 유난히 취미 생활을 즐기는 K-직장인으로 남았다.
이상과 현실 중간에서 표류하던 내게 새로운 타이틀이 생긴 건, SM C&C 입사 이후였다. 뉴스레터 기획자. 수천 명에 달하는 구독자에게 매달 제공하는 이메일 서비스. 그 안에 회사와 비즈니스와 구성원을 홍보하기 위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일.
관성처럼 하던 일에 애정이 붙은 건, 그것이 그저 새로운 일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어떤 드라마 속 캐릭터처럼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업무 성과일 때도, 취미 활동일 때도,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때도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 필요한 이야기를 뽑아내 콘텐츠화하는 일은 꽤 짜릿했다. 인터뷰뿐이랴. 공부하고 취재한 것을 재미있게 읽히도록 고민하고 글로 풀어쓰는 일은 새로운 동력으로 다가왔다.
회사는 그런 내게 꼬박꼬박 월급을 줬다. 아! 나는 글 쓰면서 돈 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언젠가 나를 울게도 웃게도 했던 이놈의 글이라는 콘텐츠는, 그렇게 나의 현업이 됐다. 아무래도 그날 선생님의 말은 틀렸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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