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무심했다.
우리의 독자가 누군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철저하게 공급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사이 독자는 우리를 떠났다. 페이스북으로, 유튜브로, 넷플릭스로.
우리를 일컫는 레거시(LEGACY)라는 단어는 과거의 화려한 유산이란 뜻이 아니다.
오히려 ‘언젠가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화석(化石)이 되고 말 것’이라는 조소 어린 시선이 더 큰 것 같다.
”
기성언론사들(이 글에서는 레거시 미디어라고 칭하겠습니다)의 디지털 파트에서 일하는 이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10여년간 디지털 퍼스트, 모바일 퍼스트를 외치며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레거시 미디어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말이죠. 바로 독자(콘텐츠 소비자)에 대한 고민, 좀 더 직접적으로는 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런 고민이 나오게 된 이유는, 디지털 영역이 전통 언론사들 사이에서 단순한 미래가치를 넘어, 생존과 연결되는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저에는 이른바 뉴미디어로 불리는 새로운 채널들의 출현, 그리고 이 채널들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새로운 플랫폼(대표적인 예가 유튜브, 넷플릭스가 아닐까 싶습니다)들의 급격한 성장이 자리잡고 있죠.
반면 레거시 미디어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지위(정보의 접근과 유통을 사실상 독점했던)에 대한 위협, 그리고 이에 따른 수익 감소화에 대한 고민(더 이상 시장의 입장에서 레거시 미디어는 유일하고 매력적인 광고의 매개가 아닙니다)으로 생존에 대해 진지한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들의 중심에는 독자들의 이탈이 있습니다. 콘텐츠의 소비자들이 떠나가고 있다는 것이죠.
언론재단이 발간한 ‘1993ㆍ2017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종이신문 가구구독률은 1993년 63.0%였지만 2017년에는 9.9%로 하락했습니다. 방송사의 뉴스 시청률 역시 마찬가지의 하락세입니다. 저녁시간 메인뉴스의 시청률이 한자리 수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특히 레거시 미디어들의 입장에서 두려운 것은 젊은 세대의 이탈입니다. 위 언론재단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2030 세대에서의 종이신문 구독률은 3.95%에 불과했습니다. 방송 뉴스 역시 2030 시청률은 5060의 1/3에도 못 미칩니다. 젊은 소비자들의 이탈은 곧 미래의 존속과 연결이 되기에 레거시 미디어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고민거리입니다.
하지만 2030 세대가 뉴스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공간,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죠. 더 이상 이들은 뉴스를 종이신문으로, TV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메인 TV 뉴스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TV앞에 기다리지도 않죠. 네모난 스마트폰을 통해,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내 취향과 관심사에 맞는 뉴스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이들에게는 ‘언론사가 이 것이 중요해! 그러니까 꼭 봐야 해’라며 쏟아내는 뉴스 콘텐츠는 무관심입니다. 더군다나 그 내용이 언론사들이 대동소이하게 쏟아내는 것이라면 더욱 관심이 없죠.
이런 상황에서 레거시 미디어들은 독자들의 떠나간 관심을 찾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그 실험의 중심에는 카드뉴스, 영상 콘텐츠와 같이 모바일 기반 독자들이 선호하는 콘텐츠 포맷을 넘어 ‘독자들과의 관계형성’이라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중앙일보의 지식 콘텐츠 플랫폼인 폴인(fol:in)입니다. ‘링커’로 불리는 전문가들이 제작하는 디지털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폴인스튜디오’라는 강연모델을 통해 오프라인에서 직접 소비자들과 만나고 있는데요.
종합일간지인 중앙일보에 비해 다루는 주제는 상당히 뾰족합니다. 일의 미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등 2030 세대 중 자기개발이나 커리어 개발에 관심 있는 이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레거시 미디어들이라면 하나의 부서, 또는 하나의 코너 정도로 치부했을 니치(niche)한 카테고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죠.
주제는 좁을지 몰라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단단합니다. 지난 2월 손석희 JTBC 사장 등이 연사로 나선 ‘브랜드의 품격’ 컨퍼런스는 5만원에 육박하는 참가비에도 300석이 모두 매진됐습니다. 최근에 는 ‘폴인스터디’라는 서비스를 새로 선보였는데요. 주제별 ‘링커’들과 3개월간 6번의 모임을 갖고 정원을 25명으로 줄이는 대신 참가비를 52만원으로 대폭 올렸는데 역시 모두 매진됐습니다. 그 동안 언론사들이 수없이 시도했던 유료 콘텐츠 모델, 그리고 대형 컨퍼런스가 아닌 작지만 밀착된 경험의 공유에 대한 성공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죠.
경향신문은 지난해 1월부터 ‘인생수업’이라는 독자 대상 교양, 생활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생활에 밀착된 다양한 주제로 매달 개최하며, 20~30명 규모로 밀도 있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조선일보 역시 건강, 부동산을 주제로 독자들과 실제로 만나는 접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자들과의 관계 강화는 오프라인 접점이 아닌 온라인에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겨레는 지난해 중순부터 ‘독편(독자편집위원회)3.0’이라는 단체 카톡방에는 한겨레21의 편집장과 기자, 그리고 수십 명의 독자가 참여해 매주 표지 후보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을 묻고, 발행 콘텐츠에 대한 리뷰와 의견을 주고 받습니다.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내밀하게 진행하던 콘텐츠의 발행 전반에 대해 독자들과 공유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레거시 미디어들이 한 때 등한시했던(매달 꼬박꼬박 신문 구독료를 내는 독자에 대해 언론사는 그들이 누구인지, 왜 신문을 보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독자들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명확합니다. 콘텐츠 소비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임미진 폴인 팀장은 “과거 언론사는 취재의 전문가인 기자들이, 마찬가지로 전문가인 취재원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대중 독자들의 반응, 관계는 빠져있었다. 기사를 쓰고 마감을 하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사가 누구에게 소비되는지, 나아가 독자들은 어떤 콘텐츠를 원하는지, 어떤 콘텐츠 소비 경험을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비자들은 더 이상 콘텐츠를 일방향으로 소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듣고 보는 것이 아닌, 콘텐츠를 만든 제작자와 함께 상호작용하는 ‘콘텐츠 소비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콘텐츠 소비자로 만족하는 것이 아닌,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또 이 경험을 관심사가 비슷한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이들이 현재의 콘텐츠 소비자라는 것입니다.
임 팀장은 “폴인 스터디의 경우 대형 컨퍼런스에 비해 한정된 인원으로 진행하는데, 전문가들의 인사이트에 대해 참가자들이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즉각 전달할 수 있는 상호작용성이 크다. 그리고 이에 대한 만족도 역시 놀라울 정도로 높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소비자와의 관계 강화는 이미 레거시 미디어 이전의 콘텐츠 스타트업들에서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멤버십 기반의 독서 토론 클럽인 트레바리는 4개월 이용 요금만 19만~29만원에 달하지만 1만명이 넘는 가입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제와 관심사는 가지각색이고, 자체 콘텐츠를 제작,배포하지도 않지만, 이용자들은 트레바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취향과 관심사의 공유라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죠. 유료 지식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퍼블리 역시 단순한 퍼블리셔의 역할이 아닌, 뉴스레터, 오프라인 모임 등을 통한 소비자들과의 접점 구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회사 모두 최근 수십 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콘텐츠 시장에서 비지니스적인 가치도 인정받고 있죠.
이처럼 독자들과의 관계형성은 향후 더욱 적극적인 미디어 트렌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언뜻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디지털 콘텐츠 환경이 더욱 발달할수록 말이죠.
필자는 지난해 ‘아날로그의 반격’의 저자 데이비드 색스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애플을 예로 들며 소비자와의 관계, 경험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온라인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애플스토어를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애플이라는 제품, 브랜드를 실제로 보고, 만지고, 경험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비록 구매는 최저가를 검색해 온라인에서 하더라도 소비자들은애플이라는상품이 실체화된공간에서, 오롯이본인들의 아날로그적 경험을 계속하고 이를 통해 더욱 단단한 애플의 고객이 될 것이란 것입니다.
여기에 최근 달라지고 있는 라이프스타일 역시 관계지향적인 콘텐츠 소비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이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여가 시간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는데요. 이런 고민에서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공유하는 실제적인 경험에 시간을 투자하는 2030 세대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가치있는 콘텐츠와 경험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매력적인 구매층이기도 하죠.
이처럼 2019년 오늘의 미디어 업계는, 콘텐츠 소비자의 취향, 관계 형성을 기반으로 소비자들이 원하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 중 입니다. 이 노력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콘텐츠 스타트업들도, 과거의 화려한 유산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는 레거시 미디어들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품이 많이 들고, 당장 비지니스적인 성과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네이버, 유튜브와 같은 거대플랫폼의 영향력은 아직도 너무나 큽니다. 하지만 더욱 치열해질 콘텐츠 시장에서 미디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매력적인 방법임은 분명합니다. 더 많은 미디어들이 잃어버렸던 독자들을 찾고, 더욱 단단한 관계를 기반으로 생존할 수 있길 바랍니다.
글. 헤럴드경제 인스파이어 팀장 서상범 기자
헤럴드경제 인스파이어 팀장 서상범 기자 ┃ 헤럴드경제 사회부, 뉴미디어팀을 거쳐 인스파이어팀을 이끌고 있다. 2018 콘텐츠진흥원 뉴미디어 콘텐츠대상 다큐교양 우수상, 2018 저널리즘 어워드 인터넷콘텐츠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18~현재 콘텐츠진흥원 뉴미디어 부문 평가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본 칼럼은 SM C&C Letter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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