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크툼PUNCHTUM
90년대 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다. ‘배낭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시절이었다. 45일 동안 12개국을 돌았으니 얼마나 파란만장했겠는가! 여행의 절반 이상은 기차에서 자고, 음식의 절반 이상은 바게트만 먹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 짠내나는 배낭여행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당시 대부분의 배낭객들은 런던이나 파리로 들어가서 런던이나 파리로 나왔다. 그러다보니, 정통 우회전 코스 또는 정통 좌회전 코스로 여행을 했다. 네덜란드나 벨기에를 시작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종착지로 하거나 또는 그 반대였다. 하지만 나는 밤기차를 타서 아침에 내릴 수 있는 거리의 도시들로 옮겨 다녔다. 일명 ‘지그재그 코스’다.
여행의 중반을 치닫던 9월 말경이었다. 새벽녘에 기차에서 튕기듯 내린 곳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였다. 네카르강Necker River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하이델베르크성을 실루엣 처리하여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괴테와 헤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걸었다는 철학자의 길을 올랐다. 긴 담벼락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 숲길을 한시간 남짓 올랐다. 그 동안 물안개는 온데간데 없고 카를 테오도로 다리 건너편의 성과 대학, 구시가지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선 하이델베르크의 전경을 한껏 즐기다가 구도심으로 내려왔다. 중앙의 마르크트 광장은 가게를 여는 부지런한 사람들로 깨어나고 있었다. 멋진 카이저 수염을 한 노년의 아저씨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이끌려 들어간 상점에서 스테들러STAEDTLER를 만났다. 정확히는 STAEDTLER Mars technico.
멋진 카이저 수염을 한 노년의 아저씨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이끌려 들어간 상점에서
스테들러STAEDTLER를 만났다. 정확히는 STAEDTLER Mars technico."
맑은 코발트빛 플라스틱 배럴에 울퉁불퉁하게 가공된 금속 그립, 누름 단추와 클립 그리고 홀더 부분은 깔끔한 금속 마감으로 말끔하게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2밀리미터 샤프?심이라니,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스테들러는 그날 그렇게 ‘그냥 날아와서 나에게 꽂혔다’.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푼크툼Punchtum의 순간이었다.
스테들러STAEDTLER
스테들러의 고향은 뉘른베르크Nuremberg다. 연필을 만드는 제작자들이 가장 먼저 생겨난 곳이다. 스테들러 가문은 이곳에서 연필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다. 1662년 뉘른베르크시의 공식 기록은 프리드리히 스테들러Friedrich Staedtler라는 사람이 ‘연필을 만드는 장인’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연필 제조 기술은 자식과 손자들로 계승되었고, 오늘날의 거대한 연필 제조 왕가로 이어졌다.
가내수공업 단계의 스테들러가 운명을 바꾼 것은 요한 세바스찬 스테들러Johann Sebastian Staedtler 대에 이르러서다. 1835년, 스테들러 회사가 설립되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 가운데 하나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1853년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에 참여하며 초기 제품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세계화에 대한 그의 야심은 스테들러사의 두번째 도약으로 이어졌다. 불과 몇 년 후, 스테들러는 미국은 물론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중동에서 이름을 날렸다. 오늘 날, 독일제 고급 연필 브랜드는 전세계 150개국이 넘는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사랑받는 스테들러의 힘은 제품의 힘이다. 부드러운 필기감, 잘 닳지 않고 쉽게 부러지지 않는 연필심, 손에 꼭 들어오는 그립감은 스테들러 브랜드의 자산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제품력에 대한 자신감이다.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노인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노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다. 노인의 볼 위에 무심하게 놓여진 연필 한자루가 사진이 아닌 그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좌). 백합화 위의 연필도 마찬가지다(우). 스테들러는 단번에 시선을 잡아끄는 비주얼의 힘이 연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광고는 단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런 자신감은 노력의 결과다. STAEDTLER turns ideas into products. 스테들러 기업 문화의 핵심이다. 1834년 연필처럼 뾰족한 크레파스를 발명한 요한 세바스찬 스테들러 이래로 스테들러는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64년 유성펜을 발명했다. 2005년에는 Anti Break System이 적용된 최초의 색연필을 만들었다. 2009년에는 연필 자체의 강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고압출 연필coextruded pencils을 최초로 개발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WOPEX를 발명했는데, 흑연과 나무, 도료 등 각각의 재료를 알갱이 형태로 가공하고 새로운 사출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기존 나무 연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립감과 필기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전통과 혁신의 결합을 통한 발명은 스테들러라는 브랜드의 독특함과 신선함을 견인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스테들러가 사랑받는 힘이다.
미네르바MINERVA
스테들러의 상징을 이야기할 때, STAEDTLER라고 하는 글자letter와 함께 빠질 수 없는 것이 로고다.
" 연필이라는 도구와 그것의 가치를 생각할 때, 지혜라는 단어보다 더 정확한 브랜드의 가치가 있을까? "
언뜻 보면 로마 병사의 이미지로 보이는 로고는 미네르바다. 미네르바는 갑옷과 투구, 창과 방패로 무장한 채 제우스의 이마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신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지혜의 신’이다. 이 여신은 다양한 영역을 관장한다. 전쟁, 기예, 직물, 도예, 요리 등의 신이기도 하다. 미네르바가 주관하는 이 다양한 분야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속성이 바로 ‘지혜’다. 호메로스는 그녀를 ‘빛나는 눈’을 지닌 신으로 표현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거기서 유래한다. 올빼미는 커다란 눈으로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간해낸다. 무지의 어둠 속에서 지혜의 빛을 밝히는 미네르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이를 상징한다. 연필이라는 도구와 그것의 가치를 생각할 때, 지혜라는 단어보다 더 적확한 브랜드의 가치가 있을까?
광고의 영역에서 보자면, 지혜의 다른 이름이 아이디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디어는 공기 중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아이디어는 말과 그림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연필이란, 공기 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말과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번역기다.
여기 스테들러의 광고를 보자. 홍콩 레오버넷의 작품이다. 누군가와 고단한 밤을 보낸 듯한 연필이 있다. 거친 나무결을 쫓아 연필심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사그리다 파밀리아가 미니어쳐처럼 박혀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카피 한 줄이 자그맣게 그어져있다. Where it all begins.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 소름!!! 의자와 자동차 그리고 세상 모든 건축물이 창조되는 그 시작점에 스테들러가 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이디어란 이런 것이다.
보이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는 것... "
아이디어란 이런 것이다. 보이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잭 포스터Jack Foster의 아이디어에 대한 정의를 보태면,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설명해 주면 내가 그걸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나?하고 의아해할 만큼 너무나도 명백한 어떤 것”이다. 레오버넷의 광고는 스테들러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스타일STYLE
다시, STAEDTLER Mars Technico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이델베르크에서 ‘그냥 날아와서 나에게 꽂힌’ 클러치 홀더를 새롭게 보게 된 것은 2년 전이다. 세계 최대 이동통신 전시회인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 느닷없이 스테들러가 등장했다. 삼성전자 갤럭시탭과 노트 시리즈의 스타일러스펜이 스테들러의 제품이었다.
스테들러의 글로벌 베스트셀러인 노리스NORIS의 디자인과 감촉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호평과 함께 MWC의 씬스틸러로 떠올랐다. 스테들러 스타일러스펜의 인기가 갤럭시탭과 노트의 판매를 견인했다는 평까지 나왔다. 원래 스타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도 모르지만, 누가 보아도 그런 줄 아는 것이다.
‘그냥 날아와서 나에게 꽂히는’ 푼크툼이란 자기 내부의 무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스테들러는 나만의 명품에서 초등학교 입학 선물 최애템으로 초딩들의 필수템이 되었다. 한때 설계 분야의 인텔리들이 선호하던 스테들러 홀더는 CAD의 영향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공사장의 공구통, 목수의 연장통 속에서 한 자루씩 발견된다. 한국사회에서 스테들러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변한 것처럼, 90년대 초반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 성취로 여겨지던 여피의 시대를 지나, 부르주아의 욕망과 보헤미안의 반항이 혼재된 보보스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나의 꼰대력은 오르고 유머감각은 곤두박질 쳤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TAEDTLER Mars technico를 첫 눈에 사랑하게 되었던 젊은 시절 나만의 스타일은 고수하고 싶다. ‘그냥 날아와서 나에게 꽂히는’ 푼크툼이란 자기 내부의 무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신념이다. 자기 내부로부터 발현되는 강한 신념, 스타일은 그것의 다른 이름이다.
글. CP7팀 한화철 팀장
'CONTENTS > Ins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콜라보레이션」현대미술과 브랜드의 만남이 가지는 시대적 가치 (0) | 2019.06.18 |
---|---|
내면으로 빛나는 브랜드 PORTER (0) | 2019.06.11 |
「오늘의 미디어」 잃어버린 독자를 찾아서 (0) | 2019.05.17 |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함께 하도록! 낯선 조합 크리에이티브 (0) | 2019.04.15 |
퇴근하고 뭐하지? 주52시간이 바꾼 '하비슈머' 라이프 (0) | 2019.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