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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Story

[오, 나의 콘텐츠 #10] 더블플레이의 황홀한 쾌감

 

글. Media4팀 김영광

 

2025 KBO리그 열기는 그 어느 해보다 뜨겁다. 정규리그 전반기만에 이미 역대 최소 경기 수로 관중 700만 명을 돌파했고, 올 시즌 경기당 평균 관중은 역대 최대를 기록해 2년 연속 관중 1천만명 돌파가 확실시되고 있다. KBO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부터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해 응원해 온 나로서는, 꾸준히 사랑받는 야구의 인기가 지속되는 것이 감개무량하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 야구는 내 모든 걸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놀이터와 운동장에서 가장 많이, 가장 즐겁게 했던 운동이 야구였고, TV 앞에 앉아 가장 열심히 본 것도 프로야구 생중계와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었다. 그 관심과 열정은 국내 프로야구를 넘어 고교야구, 일본 NPB, 미국 MLB까지 끝없이 확장됐다. 누군가에겐 2002년 월드컵 4강이 최고의 순간이었겠지만, 나에겐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이 몇 배 더 기뻤다.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눈물을 펑펑 쏟은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짜 야구’를 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고등학교 배정 때는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 가길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제대 후 복학하면서 뒤늦게 학교 야구동아리를 직접 만들었고, 그때 시작한 사회인 야구가 어느덧 26년째 이어지고 있다.

 

사회인 야구 초창기 시절엔 무조건 안타와 홈런을 많이 치는 것이 목표였다. 팀 성적보다 내 타격 기록이 좋으면 기분이 덜 우울했고, 반대로 팀이 이겨도 내 기록이 나쁘면 씁쓸했다. 타율을 높이고 타점을 많이 내는 것이 즐겁고 중요했기에, 여러 팀을 동시에 뛰며 주말마다 야구장에 나갔고, 휴가까지 내서 *용병 게임을 뛴 적도 부지기수였다.

*용병 게임이란 모르는 사람들끼리 서로 조인하는 형태의 시합이다.

 

하지만 나이 앞에 장사는 없었다. 체력은 예전 같지 않고, 새로운 취미생활이 생겼으며, 다칠 수 있다는 부담감도 커졌다. 몇 년 전부터는 사회인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다짐했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한 팀만 나가고 있었다. 그땐 이미 ‘안타와 홈런’에 대한 욕심은 사라지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자는 마음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올해, 그 한 팀에서 다시 설렘이 찾아왔다. 사회인 야구팀의 최강 전력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게 '나이'일진데, 무려 30대가 주축인 경쟁팀들을 상대로 우리 팀이 연승 행진을 이어간 것이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계속 이기다 보니 가슴 깊숙이 눌려 있던 열정이 꿈틀거렸다. 경기 날 아침이 기다려지고, 야구장에 가는 길이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제는 내가 안타를 치느냐가 아니라, 팀이 이기느냐가 전부다. 특히 공격보다 수비에서 위기를 넘기는 순간의 감동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지난 시합 때, 무사 만루 위기에서 5-2-3 더블플레이로 위기를 벗어난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포수였던 내가 3루수의 송구를 받아 1루로 정확히 던지는 순간, ‘잡았다!’는 확신과 함께 몰려온 황홀한 전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 수비 하나로 우리 팀의 승리를 결정지었다.

 

사회인 야구를 접으려 했지만, 아마 내년에도 글러브를 끼고 있을 것 같다. 무릎과 허리에 부담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좋은 선후배들과 함께 느끼는 더블플레이의 짜릿함은 쉽게 놓기 어렵다. 어쩌면 지금 나에겐, 몇 년 더 건강하게 야구하기 위해 식단 조절과 체중 감량이 더 절실한 과제일지도 모르겠지만 .